Date. 2009-08-28 19:08:37.0 Hit. 9320
[부부] 대신 울어주는 기계 | 관리자
대신 울어주는 기계



얼마 전 한 여성이 클리닉에 방문하였다. 그녀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하여 그리고 중년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심리치료를 원했다. 그녀는 이야기 중간 중간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주 소리 없는 조용한 눈물이었다. 증상적으로 우울증이 발병한 탓도 있지만 그녀의 그 눈물은 증상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이야기, 아픔,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일체 말하지 않고 (어찌 보면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꾹꾹 눌러 삭이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가족 뿐만 아니라 친구에게도 마음 속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친구도 그녀에게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눔과 공유란 없었고 접촉이란 없었다. “심리적 단절”상태였다. 그러던 그녀가 막내 아이 마저 유학을 보내고 나자 심리적 위기가 찾아들었다. 간당 간당하던 둑이 무너지듯 심리적으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속에 쌓인 것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조용히 한 말이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인간이 그리워요. 사람이....그래서 여기를 왔어요”

2년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재미있지만 다소 서글픈 기사를 읽게 되었다. “대신 울어주는 기계”. 그 기사에서는 육체의 일부가 그 고유의 기능을 잃게 되면 그 기능을 대체하는 임플란트, 의안, 의족, 가발 등의 보조물들이 그 기능을 대신 해주듯이, “감정 표현”에 약한 사람을 위한 보조 기구로 ‘대신 울어주는 기계’가 나왔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꼭 울어야 되는 상황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추를 누르면 눈물모양으로 디자인된 장치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에 저장된 울음소리도 다양하다고 한다. 이 기사에는 이 장치를 착용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는 사진도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부 무표정이다. 마치 로봇 같아 보였다. 물론 그런 컨셉으로 설정하고 사진을 찍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상당히 기계적인 느낌이었다. 그 사진에 나온 이들은 그 보조기계 덕에 필요할 때 나름 적절하게(?) 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기계가 처리하지 못하는 진정한 감정의 표현과 카타르시스, 공감, 소통은 어쩌지라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보조기계에 너무나 포괄적이고 완벽한 기능(?)을 요구하는 내가 오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지만, 눈물 안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 감정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 담긴 심리적 의미를 나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나 보다. 어쨌건, 우리가 그 기계를 사용하다 인간의 우는 기능마저 점점 퇴화가 되어 사랑니나 꼬리뼈처럼 눈물샘도 그저 인간의 지난 역사를 알려주는 한 신체구조의 징표로 퇴색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시나리오까지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이 보조기계에 대해, 아니 '눈물과 감정'에 대해 할 말이 많은가 보구나하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 부부치료를 하면서 눈물의 의미에 대해 남다른 경험과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 가져다 주는 치유의 축복을 나는 깊이 사랑하고 있는 터이다.

또 한참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Free Hug" 즉, ”무료로 안아드립니다“라는 거리활동(?)을 한 호주 남성의 기사도 떠오른다. 이 남자에 대해 일부에서는 성추행의 위험성을 논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사자는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안긴 후 뒤돌아서는 사람들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갑니다“라고. 그 어떤 것도 대신해줄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진짜 접촉, 쳐다봄과 바라봄, 다가감과 안김, 소통과 연결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던 뉴스였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시대, 점점 더 문명화되어가는 사회, 첨단의 디지털 세상이 우리 삶에 깊게 관여되고 우리 삶을 지배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다가오는 역설적인 깨달음이 있다. 바로 “인간적 교감”, “휴먼터치(human touch)의 소중함”이 그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관계”를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유아시절, 우리는 양육자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태어난다. 걸을 수 있게 되는 생후 1년이 되어도 유아는 양육자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를 영위하기 힘들다. 이때 유아가 기본생존을 위해 먹고 자고 배변하는 행위에 더하여 엄마와의, 그 누군가와의 인간적 교감이 유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인간은 신체를 가진 동시에 마음과 정신세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돌봄과 사랑을 받아야만이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생존,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아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어서도 우리에게 인간적 교감은 여전히 필요하다. 여기에서 인간적 교감이란 정서적으로 친밀한 소수의 애착대상과 지속적인 애정과 돌봄, 관심을 주고받는(give & take) 관계이다. 친구가 많고 늘 약속이 있고...그런 피상적이고 시끄러운 관계가 아닌 “견고하고 안전한(firm & secure)"관계가 중요하다. 불완전한 나와 불완전한 상대방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교감이 오고가는 관계, ”내가 너를 돕고 돌보며 너도 나를 돕고 돌보는“그런 관계가 인간적 교감, 휴먼터치의 본질이다.

그렇게...인간적 교감을 추구하고 따뜻한 휴먼터치를 주고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우리는 부부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전한 인간적 교감을 맺고 싶은 소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배우자와 현실을 함께 헤쳐 나가고 가정을 운영하는 동시에(이때는 마치 비즈니스 파트너와 같은 연결감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관계. 그러나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정서적인 인간적인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압도되며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이혼이라는 선택을 감행하는 많은 부부가 외견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 외도 등등을 이야기하나 그 이면에 본질적인 공통분모는 배우자와 더 이상 인간적 교감을 할 수 없게 된 뼈아픈 상황이 깔려 있다. 이렇게 끊어진 연결고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자 우리는 술도 마시고 일중독이 되기도 하며 채팅에도 빠져보고 쇼핑, 외도도 하게 되고 아이에게 목숨도 건다. 성형수술의 힘을 빌어 신체적 재탄생이라는 드라미틱한 인생사를 쓰기도 한다. 그래도 이 모두가 결코 우리가 원하는 진정 깊이있는 휴먼터치를 대신해주지 못한다. 지금 당신 곁의 배우자, 가족, 친구를 한 번 바라보라. 그들과 진정한 휴먼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휴먼터치가 가능한 관계인가? 그 전에, 나는 과연 휴먼터치가 가능한 정서적인 사람인가를 먼저 자문하여보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답게 삶을 영위하는 것,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우리 서로서로가 잘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로 정서와 감수성, 이에 기반한 적절하고도 적당한 휴먼터치가 우리네 삶의 키워드이다. 내가 나 자신과 교감하고 내가 타인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충분히 부드러운 연결감은 바로 내면과 정신세계, 영혼의 풍요로움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당신의 정서적 풍요로움을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와 어떤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풍요로운가? 단절되어 있는가? 혹시 정서적 교감이 배우자에 대한 집착, 강요, 의심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지는 않은가? 한번 즈음 돌아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미래의 그 시절에 혹시 “대신 살아주는 배우자”라는 기계가 나오지는 않을까? 부디 우리 다음 세대가 “관계의 불구, 감성의 불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깨어나야 할 것 같다.


2009년 8월
글/임상심리학자, 부부치료자 김선희


* 이 글은 모 계간지에 실린 필자의 칼럼으로, 수정, 편집하여 인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