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2009-08-28 19:06:55.0 Hit. 9247
[부부] 돌파구가 필요해... | 관리자
내 삶의 돌파구


그들의 돌파구 .........................# 50대 중반의 주부 서씨는 30년 넘는 결혼 생활 동안 계속된 남편의 술, 늦은 귀가, 언어폭력, 호된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얼마전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였다. 서씨는 사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이었다.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부모의 부부싸움을 보다 못한 자녀의 손에 이끌려 내게 왔을 때 서씨의 얼굴 표정은 말 그대로 어둠 그 자체였다. 벌건 얼굴의 남편 오씨도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지만 서씨도 이미 중증의 우울증이 발병한지 오래였다. 오씨는 심리치료를 거부하였으나 서씨는 꾸준한 개인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심리치료에 아주 협조적이었고 변화에 대한 동기도 높았다. 우울증은 호전되었고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남편을 어떻게 바라보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삶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씨가 가슴 뭉클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녀가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강압적인 부모의 강요로 중학교에 갈 수 없었던 서씨. 그녀는 늘 자신감이 없었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불행이 결국 ‘배우지 못해서, 내가 모자라서’라는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배움에 한이 맺혔던 서씨가 드디어 중학교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저에겐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동안 남편만 바라보며 남편이 바뀌길 바랬고 남편이 술만 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남편과 맞붙었죠. 내가 팔자가 사나와서, 내 머리가 모자라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그래서인지 내게 완벽주의 병이 있었어요. 살림부터 가족 챙기는 일, 주변 사람들 도와주기 등. 모든 일을 내가 착한 마음으로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렸죠. 주변 사람에게 한없이 퍼주어야 내 마음이 편했어요. 하지만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심리치료를 받은 것이 제게 돌파구가 되었고 중학교 과정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남편도 전과 달리 당당해진 저를 보며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학교 다니는 것이 정말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알파벳하고 수학이 좀 어렵지만. 하하”
# 30대 후반의 아내 한씨는 몇 년간 지속되어온 부부불화, 남편에 대한 의심으로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버렸다. 극복을 위해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지치고 무기력해진 그녀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짓눌러오던 모범생이라는 타이틀. 모범 아내, 모범 며느리, 모범 엄마…..속이 터질 것 같아요. 모범생 옷을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어요”. 한씨는 천하에 날라리들만 피는 것이라 여겼던 담배를 조심스레 입에 댔다. 그녀에게 담배는 그 동안의 억압, 삶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를 달래는 혼자만의 숨겨진 돌파구였다. 삶의 제 2막이 열리는 소리가 한씨의 담배 연기 속에 스며있는 듯 하였다.
# 30대 초반의 남편 강씨는 주식과 펀드가 인생의 유일한 돌파구이다. 무능력했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더 높은 곳을 향한 갈망. “제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경제적 여유, 안정을 주는 겁니다”. 그는 돌파구를 뚫고 돌진, 매진하였다. 하지만 강씨도 아내 양씨도 모두 행복하지 않았다. 되려 경제적 부침만 심해졌다. 아내 양씨는 남편이 이제는 그만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 30대 중반의 부부 김씨와 신씨는 결혼 초반부터 발생한 갈등이 7년 째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다. 사소한 일로 싸움이 시작되고 결론 없이 끝난 싸움 이후 2주 정도씩 서로 말하지 않고 각방을 쓰다 어물쩡 화해하는 반복적인 삶. 부부는 너무 답답하였고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다. 김씨와 서씨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들은 부부상담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 20대 후반의 아내 조씨는 결혼 1년 만에 심각하게 터져버린 부부갈등 앞에서 비로소 결혼 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직장도 불만족스럽고 결혼하라는 엄마의 성화에 엄마와의 격한 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던 그 시절. 아빠, 엄마의 끊이지 않는 부부싸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제겐 돌파구,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그게 바로 결혼이었죠. 모든 것을 떨치고 새로이 시작하고 싶었고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썩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연인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죠. 남편이 나를 이 불행에서 건져줄 거라고 믿었어요”

우리 모두는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우리는 인생의 재미와 행복, 정취와 여유로움을 맛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살아가는 건 고군분투라는 걸 느끼게 된다. 부부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제와 위기상황이 도래한다. 난관에 처한 부부들이 내게 찾아와 들려주는 고통, 상처, 삶의 그림자, 인간의 한계 그리고 이를 이겨내려는 의지들. 부부라는 관계 자체의 한계와 아픔들. 이 모두를 귀 기울여 들으며 나는 새삼 생각한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뒤이어 드는 생각은 삶의 굴레가 삶 전체는 아니기에 우리는 위기상황 속에서 우리의 아픔을 끌어안고 고통을 의젓하게 감당하며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 삶의 진실을 재차 깨닫게 된다. 그렇게 진정 삶에 참여할 때 나의 참자기(true self)는 진화하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내가 의젓하게 진화할 때 부부도 공동진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에덴동산 그리고 돌파구......................... 내게 찾아오는 많은 부부 중 일부는 위기상황에 담대히 직면하면서 문제를 기꺼이 끌어안고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문제상황이 그저 없어지길 바라며 왜 자신에게만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지 원망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고통이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조급히 갈망하거나 배우자를 비난하고 탓하면서 문제상황에서 빠져나가고자 애쓰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문제의 근원, 계속 불어나는 짜증과 고통을 짊어지고 내게 와 정답과 같은 묘책을 원하곤 한다. 그들은 “에덴 동산”을 찾고 있다. 문제도, 위기도, 고통도 없는 무릉도원에 대한 갈망. 그들은 마법의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신명 나는 마법의 돌파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어른(adult)으로 삶에 발을 붙이고 있다면 말이다. 달콤하고 신명 나는 마법의 돌파구는 아동기에 부모의 도움을 받아 부분적으로 주어지는 특권일 뿐이다. 현재 내 모습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한 단계 위의 모습, 나의 지금 ‘그’ 모습에서의 진화, 그것이면 족하다. 내가 한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과 여건에 맞는 돌파구. 그런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때가 바로 내 가슴과 마음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이다.

돌파구를 원하는 건 내게 과도기가 왔다는 신호.........................우리는 왜 돌파구, 탈출구를 원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생의 의미 있는 변화를 요하는 시기인 “과도기(transitional stage)”가 왔기 때문이다. 과도기란 지금까지 살아오던 내 삶의 방식이나 신념만으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도전과제와 위기가 발생하여 기존의 나 자신의 역량을 시험대에 들게 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즉 변화를 촉구하는 삶의 신호이다. 과도기가 도래하면 우리의 자아정체성(identity)은 심하게 흔들린다. 삶의 원칙들이 무너진다. 갈등과 혼란이 출현하면서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대관절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갑갑함이 몰려온다. 정신분석학자이자 발달심리학의 대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연령에 따라 심리적 발달과제(developmental task)가 주어지며 그것은 개인에게 위기이자 도전과제(crisis)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심리적 압력과 도전은 하나의 위기이자 과도기의 특성을 띄며, 이것의 해결여부가 개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성격이 인격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 어쨌든 그렇다 하더라도 위기는 고통, 당황스러움, 슬픔, 분노를 동반하기에 우리를 어렵게 한다. 위기와 과도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혼란감이라는 감정은 공히 해명을 요한다. 인간인 이상 장기적인 혼란감을 방치하고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혼란을 해명하고 해결하는 그 “과정”에서 비로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예견치 못한 위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상실과 좌절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나’라는 기존의 틀을 깨고 외부 세계와 타인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 때 나 자신이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나만의 철학, 사유(思惟)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부부라면 위기상황에서 혼란감을 끌어안고 의젓하게 나아갈 수 있다. 아픔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 이런 남편에게 부부갈등은, 이런 아내에게 부부불화는 나를 단련시켜주는 하나의 시험대이다. 그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원망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배우자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먼저 되돌아본다. 나 자신의 쇄신이 필요할 때임을 깨닫고 나의 철학을 다듬는다. 달라진 눈으로 배우자를 바라보고 부부문제와 삶을 탐구한다. 그들은 헛된, 미봉책 같은 돌파구로 돌진하지 않는다. 돌파구는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게 아니라, 마음의 도움을 받은 내 눈에 보이게 되는, 마음의 눈으로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다.

진정한 돌파구를 선택하기 위해서.........................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 자체가 주의와 배려로 피해가야 하는 암초, 소용돌이로 점철된 깊은 해원(海原)이다”라고 했다. 지독한 염세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는 그이지만 그의 관점은 분명 삶의 정곡을 찌른다. 삶의 불가피한 측면, 인간의 존재 조건인 위기와 갈등. 문제상황 앞에서 성급하게 도망가거나 현실을 탓하고 배우자를 비난한다던지, 뜬구름을 쫓는 결과가 되어버릴 확률이 높은 섣부른 돌파구를 뚫기 이전에, 고통과 고독을 견디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숙함을 발휘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고등인지기능이라는 숙명을 부여받은 인간의 진정한 고급스러움이자 품위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이나 불행은 결국 자신의 감수성과 의욕, 사유의 종합적인 결과라는 쇼펜하우어의 말, 자아(ego)가 자기(self)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라고 말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을 떠올려 보면서, 내 마음과 생각을 돌보고 배우자의 마음과 생각에 공감하는 자세를 먼저 챙겨보자. 위기상황에서 조급하게 돌파구를 찾기 전에, 나를 안아주는 너른 바다와도 같은 내 내면 세계에 ‘도움’을 청해보자. 내 ‘사유의 샘’에서 내 참자기를 힘껏 길어 올려 보자. 그게 바로 나를 지켜주는 진정한 돌파구이리라.


2009년 5월
글/임상심리학자, 부부치료자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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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모 계간지에 실린 필자의 칼럼으로, 수정, 편집하여 인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