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2007-05-21 13:22:19.0 Hit. 12111
[부부] 충분히 좋은 부부 | 관리자
충분히 좋은 부부(Good Enough Couple)

영국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소아과의사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은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이야기하였다. 유아가 좌절과 공격성, 상실을 경험할 때, 엄마가 계속적으로 공감해주고 안아주는 환경이 되어줌으로써 든든한 지지를 제공해주면 유아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아에게 최적의 편안함과 위안을 주는 엄마,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엄마가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것이다. 그가 봤을 때 유아에게 필요한 엄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평균적인, 보통의 엄마였다. 엄마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성본능에 따라 유아에게 충분히 적응하는 것,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유아의 성장을 관찰하고 이 특별한 애착관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세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늘상 완벽한 환경, 완벽한 돌봄, 완벽한 인격을 꿈꾸기에...하지만 그런 건 애초부터 있을 수 없기에.....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애착관계에서 파생된 심적 상처를 지니게 되는 숙명(fate)에 처한다. 나를 돌보는 양육자 또한 나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이므로 그러한 인간에게 돌봄을 받는 우리 모두는 "숙명적으로" 심적 상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단지 그 정도와 깊이, 색채가 다를 뿐이다. 나 또한 그런 숙명 속에서 살고 있고 내게 찾아오는 정말로 다양한 부부들 또한 심적 상처로 아파하며 클리닉에 발을 들인다. 그들의 사연, 상처, 고통, 환상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는 유아와 엄마라는 핵심적인 애착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남편과 아내라는 애착관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부부들에게서 가슴 깊이 배우게 된다. “충분히 좋은 엄마”를 넘어서서 “충분히 좋은 배우자”, “충분히 좋은 부부”의 진리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정관념과 믿음을 가지고 결혼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결혼이 나의 모든 요구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배우자가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 배우자와 완전하게 일치할 것이라는 환상, 배우자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맞추어 줄 것이라는 유아기적인 믿음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믿음은 여지 없이 무너진다. 남루한 일상, 생활 속의 끊임없는 문젯거리들, 갑작스러운 위기상황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난관들이 부부를 흔든다. 이 때 우리는 몇 가지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부족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배우자도 완벽하지 않으며 나와 배우자가 잘 맞지도 않으며 결국 내 현실과 삶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제일 먼저, 가장 쉽게 "나의 짝"인, "나의 반쪽"인 배우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은 바로 부부가 애착관계이기 때문이다. 애착관계란 특정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정서적 유대관계이다. 즉 ‘그 사람’과 특별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는 아주 귀한 애착관계이므로 부부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대화가 막힌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매우 당황하게 되거나 분노와 실망을 느끼게 된다. 내가 기대했던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는 나의 짝에 대한 실망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개념에서 이미 예견된 것처럼,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부부, 늘상 즐거운 부부, 전혀 외롭지 않은 부부, 전적으로 소통되는 부부란 있을 수 없다. 부부관계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그런 것이다. 나의 잘못도 배우자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우리는 불완전한 부부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부분적으로 수선하며 “충분히 좋은 부부”가 되면 그만이다. 충분히 좋은 부부란 서로 예측가능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주고 격려, 이해해주며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부부이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는 최적의 거리에서 적당히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집착하지 않는 애착관계가 될 수 있다. 부부에게는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그 과정 중에 부부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부부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 세계는 ‘질곡’이 새겨진 깊은 의미가 있다. 수많은 부부들이 결혼 초반에 일찌감치 갈라서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도래한 이유야 수만가지일 터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 완벽한 결혼, 완벽한 배우자에 대한 환상이 깔려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볼 일이다.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부부관계 안에는 실망과 만족, 기쁨과 슬픔, 분노와 감사함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좋은 부부란 상처와 치유라는 “재생의 테마”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이 자신의 비참함을 안다는 사실은 비참하지만, 깨닫는 그 자체는 위대하다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비참하다고 분노하며 끊임없이 싸우거나 부부관계를 청산하기에 앞서,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 그 시점에서 새로이 재생하는 부부의 삶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부관계를 돌보고 수선하는 둘만의 협조와 참여 그리고 공감과 위로 속에서 재생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고 충분히 거듭나는 부부가 되어보자.

글 : 김선희부부클리닉 원장 김선희 (임상심리전문가)

* 이 글은 2007년 5월 21일 세계일보 [시론]에 실린 필자의 글을 수정, 편집하여 인용한 것입니다.